스승이 지닌 사전적 의미는 ‘가르쳐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사람’이다. 나는 대학에 들어와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났고, 그분들로 인해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변화하였다. 오늘은 그 중 한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교수님을 처음 뵌 건 <교육학개론> 수업을 통해서이다. 나는 이 수업을 단순하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받는 수업이 아니라, 교수님이 갖고 계신 교육적 고민을 함께 나누고 이야기하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다음 학기 교양 과목이었던 <인간의 욕구와 교육>을 수강하며, 교수님의 선한 영향 아래 많은 성장을 하게 되었다.
<인간의 욕구와 교육> 수업은 매슬로의 동기 이론에 기초한 인간의 욕구에 대한 객관적 지식 습득을 바탕으로 학생 자신의 실천적 삶에 대한 탐구 과정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수업에서는 매슬로의 욕구 구조를 비롯해, 에리히 프롬의 존재적 삶의 태도와 다른 여러 교육적 시사점을 다루었다. 언뜻 보면 여타의 교양 과목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수업이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던 것은 수업 과정에서 수업의 목표처럼 스스로 실천적 삶에 대한 고민을 할 기회, 개개인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는 점이다. 학기의 분기점이 되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는 일정 지식을 체득했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평가가 아닌, 배운 지식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자신의 고민을 더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당시 수업을 수강하던 학생이 많지 않아 더욱 자유로운 토론식 수업이 주를 이루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자유롭게 안부를 물으며, 자연스럽게 수업 주제와 관련한 토론이 오가곤 했다. 이렇게 이어지는 수업의 과정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나의 삶을 고민하고, 고민한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실천적 삶에 대한 고민이 절실한 순간이었던 그때이니만큼 내게는 이 수업이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 학기 동안 이 수업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불완전함’에 대한 이해이다. 나는 나에 대한 기대치와 목표 기준이 높다. 욕심이 많아서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부족한 부분, 남들에 비해 뒤처지는 모습을 먼저 보며 살아왔다. 이러한 나의 고민들을 포착하신 교수님께서는 수업을 통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굴복을 의미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셨다. 또 삶을 편안하게 바라볼 여유를 보여 주셨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 마음의 여유를 옮아왔다.
이 ‘불완전함’은 매슬로가 말하는 자아실현자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며, 존중 및 수용적 태도와도 연결된다. 물론 매슬로가 제시한 자아실현자의 19가지의 특성을 나는 다 지니고 있지도, 다 지닐 수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러한 배움 속에서 나는 내 나름의 삶 속에서 그러한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 나는 나의 부족한 부분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매슬로가 말했듯 이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인간은 없다. 선한 사람, 무척 선한 사람, 정말 위대한 사람들은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런 비범해 보이는 사람 역시 때때로 지루하고, 짜증나게 하며, 거만하고, 이기적이며, 분노하고, 우울해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종종 간과하며 지낸다. 때문에 이기적이고, 분노하고, 우울해 하는 내 모습과 ‘괜찮은 삶’을 사는 모습을 비교하며 힘들었던 것 같다.
학기 중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은 나는 점차 나의 부족한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편해지고 나 자신에 대한 존중감도 생겨났다. 지금 당장 나의 개별적 정체성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몇몇 천재나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해서 나의 가치나 나의 존재가 폄하될 수도, 누구로부터도 평가받을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고 나니, 타인에 대한 불완전성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 저렇게 밖에 할 수 없을까?’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가진 평가의 잣대를 타인에게 들이밀던 나는 이제, 내가 그렇듯 다른 사람들도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이 수업을 통해 바람직한 욕구에 대해, 바람직한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특히 자아실현자가 보이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 중 ‘불완전함’에 대한 수용과 존중이라는 좋은 가치를 배울 수 있었다. 이는 삶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꼭 필요했던 삶의 태도이기도 했다. 그것을 간과하고 지내던 지난날과 달리 앞으로는 이러한 가치를 마음에 새기고,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학기를 마친 이후, 진로를 앞두고 고민하는 내가 이전과 사뭇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1년 전이었다면 ‘나는 왜 또 진로를 고민할까. 나는 왜 확실하지 않고, 늘 불안한 존재일까.’의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불완전한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사는 일이 버거워질 때면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세상을 항상 긍정적이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생활합시다. 알고 보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여유 없고 늘 치열하기만 했던 내가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건 분명 이 시기가 지나서였다.
교생실습에 나가 있는 중 스승의 날이 왔고, 근황을 알리며 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더니 흔쾌히 답장을 주셨다. 교생 실습에서 돌아오자마자 교수님께 연락을 드려 뵙게 되었고, 나는 그간 나의 변화한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말씀 드리게 되었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임용을 준비하려 했지만, 가서 경험한 직업으로서의 교사는 생각과 너무도 차이가 있어 진로를 다시 고민하고 있어요.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실천으로서의 교육이 아니라 교육에 얽힌 다양한 철학적, 행정적 여러 문제들에 더욱 관심이 있더라고요. 그래도 이제는 이런 고민들을 좌절하며 하는 게 아니라서 좋아요.” 교수님께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글에 대한 관심, 전공에 대한 관심,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고려해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한 가능성에 관한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다. 특히 교수님께서는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 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인정해주셨다. 존경하는 분께서 내가 가진 어떤 것을 인정해주시고, 가능성을 봐주시니 어느 정도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다.
교수님을 뵙고 집에 오는 길 교수님께서 남기신 연락을 받았다.
“장래에 대하여 서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의논할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환영이야.”
경직된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로서의 스승과 제자. 언제나 내가 가진 생각의 틀을 벗어나 더욱 다양하고 넓게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고, 또 인생의 선배로서, 교육자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며 조언해주시는 교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이 조금 더 튼튼해진 것 같다.
앞으로 나는 사람을 가르치는 직업, 크게 보면 내가 가진 지식을 연구하고, 타인에게 전달하는 일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나는 타인에 대한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아주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다하더라도, 적어도 쓸모 있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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