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

신현림, 사과밭에서 온 불빛

Danao 2019. 2. 6.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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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서 밥과 술을 마셔도
결국은 지는 사과꽃처럼 흩어지고 헤어진다
매일 죽어가는 건 아이들도 알까

매일 다시 태어나도
고요한 자기 안의 길을 못 찾으면
풀죽은 와이셔츠만 걸어 다니고
까만 구두들만 돌아다니네

텅 빈 굴다리를 홀로 건너듯 쓸쓸히
마흔이 되면 나는
죽을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두 손과 두 어깨는 기댈 곳이 없었고
하늘에 구멍은 자꾸 커졌지
태양보다 한숨이 오가는 구멍을 보면서
그저 한심하게 행주처럼 울음을 끌어안고
슬픔을 멈추는 스위치도 없을 때

사과밭에서 온 불빛들이 나를 흔들어 깨웠어
월말, 연말, 종말이 온다는 한계도 생각 못할 때
여기에 내가 있기에 저기는 갈 수 없고
불빛 하나둘을 가지면 다른 불빛을 포기해야 함을 알았네
애를 가졌고 혼자 키워야 했기에
포기한 일과 만남들이 늘어남을 받아들였어
묻지는 마, 다 말하면 가뭇없이 사라지니까
이제 상복을 입은 나날을 애도하고
시커먼 눈발이 쏟아지도록 아픈 시간에 묵념할 수 있네

나는 천천히 흘러가겠네
괴로워야 할 시간은 충분하고
아파야 할 시간이 허다하고
사랑해야 할 시간이 아직도 많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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