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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

유계영, 겨울에 쓰는 여름 시

by Danao 2023.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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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스타일로 말해보았다
죽고 싶다는 말을
비장하게도 어리게도 아름답게도
다만 죽고 싶게도 그러다
웃음이 터져나올 때까지

물들도록
한쪽 콧구멍에 쑤셔넣은 휴지 뭉치처럼
서서히 붉어지도록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죽으려 해도 살게 될 것이며
살려 한다면 죽도록 살게 될 것이며

다시없을 폭설이 내렸다
겨울의 땅들은 훌륭한 건망증으로
이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을 것이다
작년에도 이렇게 추웠을까
올여름에도 작년 겨울에도 너는 변함없이 묻는다

마른 머리카락이 바람의 긴 손가락을 기억할 리 없듯이

작년 겨울, 작년의 작년 겨울, 작년의 작년의 작년의


겨울은 과거로 거슬러올라갈수록
머리가 검어지는 여자들 같다

흉골 사이로 벌레가 지나가서
찰싹 때렸는데 흐르는 땀이었다
처음 본 벌레가 벽에 붙어 울고 있었다

나는 아침밥을 먹으며 오들거렸다
겨울과 무관하게
이웃집 창문에 걸쳐진 티셔츠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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