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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7

박준, 어떤 과거가 현재에 도착하듯이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2023. 8. 25.
박준, 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2019. 5. 2.
박준, 그해 봄에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2019. 1. 2.
박준, 해남으로 보내는 편지 오랫동안 기별이 없는 당신을 생각하면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울음이 먼저 걸어나오더군요그러고는 바쁜 걸음으로 어느 네거리를 지나 한 시절 제가 좋아한 여선배의 입속에도 머물다가 마른 저수지와 강을 건너 흙빛 선연한 남쪽 땅으로 가더군요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땅 황토라 하면 알 굵은 육쪽마늘이며 편지지지처럼 잎이 희고 넓은 겨울 배추를 자라게 하는 곳이지요 아리고 맵고 순하고 여린 것들을 불평 하나 없이 안아주는 곳 말입니다해서 그쯤 가면 사람의 울음이나 사람의 서러움이나 사람의 분노나 사람의 슬픔 같은 것들을 계속 사람의 가슴에 묻어두기가 무안해졌던 것이었는데요땅 끝, 당신을 처음 만난 그곳으로 제가 자꾸 무엇들을 보내고 싶은 까닭입니다 2018. 12. 29.
박준,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요와 홑청 이불 사이에 헤어 드라이어의 더운 바람을 틀어놓으면 눅눅한 가슴을 가진 네가 그립다가 살 만했던광장(廣場)의 한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과 사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강냉으로 돌리고 그 방에서 살아나왔다내가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 것처럼 이 버튼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맥주나 음료수를 넣어두고 왜 차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여관의 방들은 곧잘 하고 있다“다시 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라고 말하던 여자의질긴 음성은 늘 내 곁에.. 2018. 12. 27.
박준, 용산 가는 길-청파동1 청파동에서 그대는 햇빛만 못하다 나는 매일 병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빛은 적막으로 드나들고 바람도 먼지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나왔다 청파동에서 한 마장 정도 가면 불에 타 죽은 친구가 살던 집이 나오고 선지를 잘하는 식당이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약을 지어준다는 약방도 하나 있다 그러면 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을 찾아가 패를 좀 부리다 오고 싶기도 하고 잔술을 마실까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 아가씨의 흰 손에 맥이나 한번 잡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2018. 12. 26.
박준, 손과 밤의 끝에서는 까닭 없이 손끝이상하는 날이 이어졌다 책장을 넘기다손을 베인 미인은아픈데 가렵다고 말했고나는 가렵고 아프겠다고 말했다 여름빛에 소홀했으므로우리들의 얼굴이 검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새벽이 오면내어주지 않던 서로의 곁을 비집고 들어가쪽잠에 들기도 했다 2018.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