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t106

송기영, 연인 활주로를 끝까지 달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끝에 다다르기 전에 그들은 살짝 몸을 비튼다. 아주 간곡히 스스로를 탕진하기 바로 전 활주로보다 조금 긴 네 웃음, 날개 2024. 1. 3.
정호승, 꽃과 돈 돈을 벌어야 사람이 꽃으로 피어나는 시대를 나는 너무나 오래 살아왔다 돈이 있어야 꽃이 꽃으로 피어나는 시대를 나는 죽지 않고 너무나 오래 살아왔다 이제 죽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꽃을 빨래하는 일이다 꽃에 묻은 돈의 때를 정성들여 비누칠해서 벗기고 무명옷처럼 빳빳하게 풀을 먹이고 꽃을 다림질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돈을 불태우는 일이다 돈의 잿가루를 밭에 뿌려서 꽃이 돈으로 피어나는 시대에 다시 연꽃 같은 맑은 꽃을 피우는 일이다 2023. 11. 26.
이병률, 새 자면서 누구나 하루에 몇 번을 뒤척입니다 내가 뒤척일 적마다 누군가는 내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지구의 저 가장 안쪽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자면서 여러 번 뒤척일 일이 생겼습니다 자다가도 가슴에서 자꾸 새가 푸드덕거리는 바람에 가슴팍이 벌어지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앉아야 죽지을 않겠습니다 어제는 오늘은 맨밥을 먹는데 입이 썼습니다 흐르는 것에 이유 없고 스미는 것에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나는 생겨먹었습니다 신(神)에게도 신이 있다면 그 신에게 묻겠습니다 지구도 새로 하여금 뒤척입니까 자다가도 몇 번을 당신을 생각해야 이 마음에서 놓여날 수 있습니까 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7) 2023. 11. 23.
나희덕,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2023. 11. 22.
권선옥, 별 ​ 나의 어둠은 네 배경이다 이 땅의 사람들은 너를 바라보면서도 왜 네가 별이 되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내 가슴에 떨군 숱한 눈물과 그리움 뉘우침 같은 것들로 빛이 되었음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애초에 다만 하나의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는 무심한 사람들에게 나의 어둠을 말할 수는 없다 너의 배경에서 아무 흔적도 없이 사위어 가는 그 많은 날들의 그림자를 아무도 보지 못하였으리라 다만 다만 하나의 반짝이는 너를 나는 가슴에 담고 앞으로도 너를 사람들은 별이라고 부르리라 2023. 11. 19.
황지우,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 2023. 11. 18.
이형기,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이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2023. 11. 13.
강현덕, 사랑 이 호수도 예전엔 조금만 웅덩이였으리 어쩌다 발을 헛디뎌 주저앉는 바람에 몇 차례 빗물 고이고 나뭇잎 떠나뎠으리 이 호수도 나처럼 후회하고 있으리 어쩌다 널 헛디뎌 여기 빠져 있는지 조그만 웅덩이였을 때 흙 몇 줌 다져줄 것을 2023. 10. 11.
안준철, 꽃도 서성일 시간이 필요하다 집에서 덕진연못까지는 자전거로 십오 분 거리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연꽃은 눈 세수라도 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처럼 신호등에 한 번도 안 걸린 날은 연못 입구에서 조금 서성이다 간다 연발을 둘러보니 어제 꽃봉오리 그대로다 아, 내가 너무 서둘렀구나 꽃도 서성일 시간이 필요한 것을 2023.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