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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106

문태준, 검은모래해변에서 겨울 바다에 오니 몸살이 난 듯 나는 내가 숨차다 파도는 나를 넘어간다 게으르고 느른한 나를 들판보다 거대한 파도는 전면적으로 나를 허물어뜨리고 나는 해변에 나를 펼쳐놓고 모래의 내면을 펼쳐놓고 여러 해가 되었군 격랑 아래 내면을 펼쳐놓은 지 해풍은 저 멀리서 매섭게 또 눈 뜨고 파도는 들고양이처럼 흰 이마를 길게 할퀸다 2020. 2. 6.
김경주, 목련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12년 동안 자취(自取)했다 삶이 영혼의 청중들이라고 생각한 이후 단 한 번만 사랑하고자 했으나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 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2020. 2. 4.
윤병모, 당신과 나의 학이편 나의 옛날을 사는 당신과 당신의 훗날을 사는 내가 외따로인 것은 별빛처럼 빛이 닿아도 열은 닿지 않아서이지 ​ 빛은 열에서 태어나지만 빛 없는 열은 당신이고 열 없는 빛은 나이니까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 안녕의 시절은 시간이었지 어느 때부터 어느 때까지였지 빛이 열의 손을 놓았던 때는 시각이었지 때를 새긴 어느 한 순간이었지 시간의 변주가 시작된 때였지 ​ 흩어졌지 오래도록 재편되지 않아 옛날이 훗날로 이행하는 중이었지 어둠을 길 삼아 고독한 길을 갔지 길은 고독을 배웠고 고독은 길을 익혔지 배우고 익혀도 기쁨은 따라오지 않았지 ​ 훗날을 사는 내가 멀리서 찾아갔지 옛날을 사는 당신이 찾아오지 않아 내가 당신을 찾아갔지 훗날이 옛날을 즐거워했지만 내가 당신을 즐거워할 뿐이었.. 2019. 8. 25.
박준, 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2019. 5. 2.
이희중, 백일홍(百日紅) 너는 지금 청준(靑春) 아닌 홍하(紅夏), 설령 필생의 여름을 걸고 내게 온다 해도 너와 함께 먼 미래를 재어볼 수는 없네 말하자면 나는 이미 다른 꽃으로 집을 지었으니 바람이 집을 허물게 두는 것은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 이라 지금도 생각하거든 붉은 여름 내내 저 짙푸른 산 앞에서 수다한 붉은 말을 내게 속삭인다 해도 굳이 밝히자면 나는 붉은 꽃이 만발한 네 몸이 탐날 뿐 네 붉은 몸을 잘 보고 싶을 뿐 네 붉은 몸을 잠시만 만지고 냄새 맡고 싶을 뿐 네가 사랑으로 방향을 물어온다면 짐짓 나도 사랑으로 가리킬 수는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 백 일 비밀스런 사랑의 시늉뿐 너는 아직 서른 해도 살지 않아 줄기는 무르고 약한데 그래도 저렇게 무거운 붉은 꽃들을 이고 있는데 나는 머리카락도 많이 색을 잃.. 2019. 4. 4.
김양숙, 삼월에 걸려 넘어지다 독일의 한 예술가는 나치정권에 희생된 사람들이 살았던 장소의 멀쩡한 길바닥 을 파내어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희생된 날짜가 새겨진 동판을 박아 놓아 걸림돌 을 만들었다는데 그리하여 조상들이 저지른 비극적 역사를 숨기기보다 부끄러워하며 과거의 잘못 을 일상처럼 마주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며 반성한다는데 그렇다 너희들은 침략한 것이다 아름답게 뻗어 내린 백두대간의 등줄기에 쇠못 박으며 능욕하였다 굽이굽이 흐르는 성스러운 물줄기를 강점하여 피로 더럽혔다 그러나 어디에도 슈돌퍼슈타인* 같은 것은 없고 목숨을 내 놓고, 손가락을 자르고 맹세하며, 끓는 피로 지켜낸 이 나라 오천년의 역사를 간사한 혀로 왜곡하느냐 등줄기 곧추세운 백두대간이 뻗어나간 만주벌판 동해라는 이름으로 품어 안은 독도 남쪽을 .. 2019. 3. 9.
김소연,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미리 무덤을 팝니다 미리 나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을 비는 일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한 너의 오열도 오열 끝의 오한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의 지복도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궁극이 폐허입니다 한 세기가 지나갈 때마다 한 삽씩 뜨거운 땅을 파고 이 별의 핵 지대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너를 만나길 지나치게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안에 들어가 미리 누워봅니다 생각보다 깊고 아득합니다 그렇지만 무섭고 춥습니다 너는 내 귀에다 대고 거짓말 좀 잘해주실래요 너무나 진짜 같은 완벽한 거짓말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찾듯 거짓말 덕분에 이 우주는 겨우 응석을 멈춥니다 어지럽습니다 체한 걸까요 손을 넣어 토하려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여긴 왜 이렇게 추운가요 너는 여기로 올 때에 좀 조심해서 와주실래요 뒤를.. 2019. 3. 7.
황동규, 초가 나는 요새 무서워져요. 모든 것의 안만 보여요. 풀잎 뜬 강에는 살 없는 고기들이 놀고 있고 강물 위에 피었다가 스러지는 구름에선 문득 암호만 비쳐요. 읽어봐야 소용없어요. 혀 잘린 꽃들이 모두 고개 들고 불행한 살들이 겁 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어요. 달아난들 추울 뿐이예요. 곳곳에 쳐 있는 그물을 보세요 황홀하게 무서워요. 미치는 것도 미치지 않고 잔구름처럼 떠 있는 것도 두렵잖아요. 2019. 3. 6.
안도현, 북항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 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불꺼진 삼십 촉 알전구처럼 포구에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 이 해안도시는 따뜻해서 싫어 싫어야 돌아누운 북항, 탕아의 눈밑의 그늘같은 북항,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북항, 하면 아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이 있을 것.. 2019.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