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t106

조연호, 달력의 순서 너는 화살표 방향으로만 여행 떠나고 인화액 속엔 천천히 부서지며 떠오르던 6월 먼지들. 너는 어두운 공을 골랐고 바람은 병든 잎마다 검진록을 적었다. 감추고 싶었니? 생식기에서 흐르는 물 따위를 언니와 엄마가 함께 수첩에 적어두는 게 슬프지 않았니? 달마다 너만 아는 첫날과 마지막 날의 달력이 완성될 때, 보라색 수국은 시시한 빙고게임에서 가로 다섯 줄 도제(徒弟)식 슬픔을 완성했다. 맑은 제방에 똑딱벌레처럼 하나씩 앉아 애들이 합창한다. 익숙하지 못한 척 처음인 척 우리 이대로 달력의 마지막 장까지 훌쩍 자라자. 너는 사라진 것들을 등받이 의자에 올려놓을 수도 있고 이제 겨우 누군가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나이. 우리는 강둑에 공명통처럼 둥글게 앉아 저녁의 소리를 부풀렸다. 그건 악운이었을까? 구름 속엔.. 2023. 9. 4.
이수진, 슬픔은 깨어나는 법 해야 할 이별이 있을 땐 꽃을 무덤처럼 사는 버릇이 내겐 있다 압축된 문장처럼 슬픔을 허용하여 슬픔을 건너가는 방법으로, 어느 해 여름 데이지 꽃을 사들고 오후의 고개를 떨궜을 때 이제 좀 괜찮은 거니, 어느 목소리에 막혔던 울음이 쏟아진 일은 괜찮아서 그런 건지 괜찮아야 해서 그런 건지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슬픔은 자꾸 깨어나는 법 소설 속 혼자 밥 먹는 사람처럼 느닷없는 깨어나고 잠드는 날이 미래가 될 때 화병의 물을 갈아준 적이 있다 꽃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마치면 꽃잎마다에 하늘이 내려앉고 바람이 내려앉고 빗물이 내려앉은 얼룩에도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 걸음을 앞으로 옮기려면 보려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한 시절의 희미한 문장으로 꽃에 가 닿으면 아득이란 말을 .. 2023. 9. 2.
이재연, 너무 많은 여름 이런 여름은 이제 시작에 불과해 바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작은 새가 바람과 별개가 아닌 여름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 ​ 어디든 잠깐 앉았다 떠나는 새는 자유로울 거야 시작되었다 하면 끝나는 것이 여름이야 ​ 그동안의 여름은 여름도 아니야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마 그렇게 진행되어 온 거야 살아가는 일이 그래 새처럼 계절마다 다른 음계를 짚으며 우주라는 악보를 읽다가 연꽃은 홀로 천 개의 잎을 피어 올리는 거지만 ​ 사라져버린 커튼이 이유 없이 날리는 저택의 한여름 밤은 단물이 줄줄 흐르다가 뚝 그치는 과수원과 빗줄기 사이에서 파생하는 빛과 그늘의 협연이야 ​ 이번 생은 버려진 붉은 벽돌의 저택을 리모델링하는 꿈을 꾸다가 리조트로 달려가 완전한 휴가를 즐기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마 이 여름이 끝날 무렵.. 2023. 9. 1.
김대호, 나는 슬픔을 독학했다 슬픔은 수학이었다 수시로 슬픔의 문제를 풀었다 슬픔의 공식이 있었으나 슬픔을 풀 때는 공식에 대입했다 내 슬픔과 당신의 슬픔을 잇는 가장 가까운 선을 구하는 문제는 아직도 푸는 중 당신의 인생을 더하고 내 인생을 빼고 당신과 나의 감정을 미적분하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오래된 내 병은 어떤 공식을 대입해도 풀리지 않았다 지독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넬슨 만델라는 모든 사람에겐 선이 있다고 믿었다 나 역시 성선설을 믿고 있지만 몸은 항상 뻣뻣하다 착하게 살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슬픔의 방정식은 풀린다 내 불행이 슬픔의 근육을 단련한다 허술한 희망보다 단단한 슬픔은 얼마나 건강해 보이는가 슬픔의 답안지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지우지 못한 살림살이같이 숫자와 공식과 괄호만 남아있다 2023. 8. 31.
유계영, 겨울에 쓰는 여름 시 여러 가지 스타일로 말해보았다 죽고 싶다는 말을 비장하게도 어리게도 아름답게도 다만 죽고 싶게도 그러다 웃음이 터져나올 때까지 물들도록 한쪽 콧구멍에 쑤셔넣은 휴지 뭉치처럼 서서히 붉어지도록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죽으려 해도 살게 될 것이며 살려 한다면 죽도록 살게 될 것이며 다시없을 폭설이 내렸다 겨울의 땅들은 훌륭한 건망증으로 이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을 것이다 작년에도 이렇게 추웠을까 올여름에도 작년 겨울에도 너는 변함없이 묻는다 마른 머리카락이 바람의 긴 손가락을 기억할 리 없듯이 작년 겨울, 작년의 작년 겨울, 작년의 작년의 작년의 ​ 겨울은 과거로 거슬러올라갈수록 머리가 검어지는 여자들 같다 흉골 사이로 벌레가 지나가서 찰싹 때렸는데 흐르는 땀이었다 처음 본 벌레가 벽에 붙어 울고 있었다.. 2023. 8. 26.
박준, 어떤 과거가 현재에 도착하듯이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2023. 8. 25.
한강,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 2023. 8. 24.
박남준, 꿈길에서도 길은 어긋나고 오랜 길가에 서면 간절하게 밀려오는 사람 비가 내려야 온몸 젖어가는 것은 아니다 나 떠나온 많은 날에도 잠들지 않고 천천히 아주 깊어져서 숲은 잠겨가고 취하지 않고는 갈 수 없다 길 끝에서 돌아오면 산중 가득 눕지 않고 서성이는 어둠들의 그 수목 같은 목 긴 기다림 쓰러지며 내게 안겨 무너져올 파도 같은 울음 차마 볼 수 없어서 서둘러 불 밝힐 수 없어서 발길 돌리면 길은 다시 정처없고 참 아득하다 별들 낡을 대로 이미 바랜 꿈 하나 아름답다 그대만이 나의 그리움이던 목숨이던 날들 갈 곳 없는데 이제 지쳐 돌아갈 수 없는데 왜 나는 아직껏 버리지 못하는 것이냐 비틀거리며 끌어안고 흔들리는 것이냐 2020. 5. 15.
문태준, 매일의 독백 나를 꺼내줘 단호한 틀과 상자로부터 탁상시계로부터 굳어버린 과거로부터 검은 관에서 끄집어내줘 신분증과 옷으로부터 흐르는 물속에 암자의 풍경 소리 속에 밤의 달무리 속에 자라는 식물 속에 그날그날의 구름 속에 저 가랑비와 실바람 속에 당신의 감탄사 속에 넣어줘 나는 다음 생(生)에 놓아줘 서른 세 개의 하늘에 풀어놓아줘 2020.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