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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106

진은영,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 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가슴에도 달린 것처럼 기묘하고 집요하고 당황스럽고 참 이상하구나 인유가 심한 시 같구나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투명한 삼각자 모서리처럼 눈매가 날카로운 관료에게 제출해야 할 숫자의 논문을 쓰고 “아무도 스무 살이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걸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라고 써 보낸 어린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나보다 잘 쓰면서 우연히 .. 2018. 11. 28.
정현종, 독무 1 사막에서도 불 곁에서도 늘 가장 건장한 바람을, 한끝은 쓸쓸해 하는 내 귀는 생각하겠지. 생각하겠지 하늘은 곧고 강인한 꿈의 안팎에서 약점으로 내리는 비와 안개, 거듭 동냥 떠나는 새벽 거지를. 심술궂기도 익살도 여간 무서운 망자(亡者)들의 눈초리를 가리기 위해 밤 영창(映窓)의 해진 구멍으로 가져가는 확신과 열애(熱愛)의 손의 운행을. 알겠지 그대 꿈속의 아씨를 좇는 제 바람에 걸려 넘어져 종골(腫骨) 뼈가 부은 발뿐인 사람아, 왜 내가 바오로서원의 문 유리 속을 휘청대며 걸어가는지를 한동안 일어서면서 기리 눕는 그대들의 화환과 장식의 계획에도 틈틈이 마주 잡는 내 항상 별미(別味)인 대접(待接)을. 하여, 나는 세월을 패물처럼 옷깃에 달기 위해 떠나려는 정령(精靈)을 마중 가리. 부족으로 끼룩대는.. 2018. 11. 28.
김혜순, 열쇠 역광 속에 멀어지는 당신 뒷모습 열쇠 구멍이네 그 구멍 속이 세상 밖이네 어두운 산 능선은 열쇠의 굴곡처럼 구불거리고 나는 그 능선을 들어 당신을 열고 싶네 저 먼 곳, 안타깝고 환한 광야가 열쇠 구멍 뒤에 매달려 있어서 나는 그 광야에 한 아름 백합을 꽂았는데 찰칵 우리 몸은 모두 빛의 복도를 여는 문이라고 죽은 사람들이 읽는 책에 씌어 있다는데 당신은 왜 나를 열어놓고 혼자 가는가 당신이 깜빡 사라지기 전 켜놓은 열쇠 구멍 하나 그믐에 구멍을 내어 밤보다 더한 어둠 켜놓은 캄캄한 나체 하나 백합 향 가득한 그 구멍 속에서 멀어지네 2018. 11. 28.
이정하, 멀리서만 찾아나서지 않기로 했다 가기로 하면 가지 못할 일도 아니나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움 안고 지내기로 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대가 많이 변했다니 세월따라 변하는 건 탓할 건 못 되지만 예전의 그대가 아닌 그 낭패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멀리서 멀리서만 그대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2018. 11. 28.
이정하, 빈 강에 서서 1 날마다 바람이 불었지 내가 날리던 그리움의 연은 항시 강 어귀의 허리 굽은 하늘가에 걸려 있었고 그대의 한숨처럼 빈 강에 안개가 깔릴 때면 조용히 지워지는 수평선과 함께 돌아서던 그대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랐지. 저무는 강, 그 강을 마주하고 있으면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목숨처럼 부는, 목숨처럼 부대끼는 기억들뿐이었지. 2 미명이다. 신음처럼 들려오는 잡풀들 숨소리 어둠이 뒷모습을 보이면 강바람을 잡고 일어나 가난을 밝히는 새벽 풍경들. 항시 홀로 떠오르는 입산금지의 산영(山影)이 외롭고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슬픔의 시작이었지. 3 다시 저녁. 무엇일까 무엇일까 죽음보다 고된 하루를 마련하며 단단하게 우리를 거머쥐는 어둠, 어둠을 풀어놓으며 저물기 시작한 강, 흘러온 지 오래인 우리의 사랑.. 2018. 11. 28.
기형도, 10월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은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 2018. 11. 28.
이정록, 내 품에, 그대 눈물을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 그대가 훅 불면 하얀 속이 다 보이지 방을 얻고 도배를 하고 주인에게 주소를 적어 와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를 들이는 사이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면 봉숭아 씨처럼 달려나가는 거야 우리가, 같은 주소를 갖고 있구나 전자레인지 속 빵봉지처럼 따뜻하게 부풀어 오르는 우리의 사랑 내 가슴은 포도밭 종이봉지야 그대 슬픔마저 알알이 여물 수 있지 그대 눈물의 향을 마시며 나는 바래어가도 좋아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대 그늘에 다가갈 수 있는 내 사랑은 포도밭 종이봉지야 그대의 온몸에, 내 기쁨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로 갈 거야 긴 장마를 건너 햇살 눈부신 가을이 될 거야 2018.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