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5 나희덕,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2023. 11. 22. 권선옥, 별 나의 어둠은 네 배경이다 이 땅의 사람들은 너를 바라보면서도 왜 네가 별이 되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내 가슴에 떨군 숱한 눈물과 그리움 뉘우침 같은 것들로 빛이 되었음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애초에 다만 하나의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는 무심한 사람들에게 나의 어둠을 말할 수는 없다 너의 배경에서 아무 흔적도 없이 사위어 가는 그 많은 날들의 그림자를 아무도 보지 못하였으리라 다만 다만 하나의 반짝이는 너를 나는 가슴에 담고 앞으로도 너를 사람들은 별이라고 부르리라 2023. 11. 19. 강현덕, 사랑 이 호수도 예전엔 조금만 웅덩이였으리 어쩌다 발을 헛디뎌 주저앉는 바람에 몇 차례 빗물 고이고 나뭇잎 떠나뎠으리 이 호수도 나처럼 후회하고 있으리 어쩌다 널 헛디뎌 여기 빠져 있는지 조그만 웅덩이였을 때 흙 몇 줌 다져줄 것을 2023. 10. 11. 안준철, 꽃도 서성일 시간이 필요하다 집에서 덕진연못까지는 자전거로 십오 분 거리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연꽃은 눈 세수라도 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처럼 신호등에 한 번도 안 걸린 날은 연못 입구에서 조금 서성이다 간다 연발을 둘러보니 어제 꽃봉오리 그대로다 아, 내가 너무 서둘렀구나 꽃도 서성일 시간이 필요한 것을 2023. 10. 10. 이재연, 너무 많은 여름 이런 여름은 이제 시작에 불과해 바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작은 새가 바람과 별개가 아닌 여름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 어디든 잠깐 앉았다 떠나는 새는 자유로울 거야 시작되었다 하면 끝나는 것이 여름이야 그동안의 여름은 여름도 아니야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마 그렇게 진행되어 온 거야 살아가는 일이 그래 새처럼 계절마다 다른 음계를 짚으며 우주라는 악보를 읽다가 연꽃은 홀로 천 개의 잎을 피어 올리는 거지만 사라져버린 커튼이 이유 없이 날리는 저택의 한여름 밤은 단물이 줄줄 흐르다가 뚝 그치는 과수원과 빗줄기 사이에서 파생하는 빛과 그늘의 협연이야 이번 생은 버려진 붉은 벽돌의 저택을 리모델링하는 꿈을 꾸다가 리조트로 달려가 완전한 휴가를 즐기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마 이 여름이 끝날 무렵.. 2023. 9. 1.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