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106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2018. 12. 19. 김영찬,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 플라톤의 생각이 달랐겠지 삼각형 건물이 난세에 판을 치거나 골치 아픈 삼각형공리가 수시로 바뀌겠지 자동차 바퀴가 생각할 줄 안다면, 운전수는 곤혹스럽겠지 제발 좀 가자는 데로 가자! 타이어가 닳지 않는 곳으로만 굴러가겠지 담뱃불이 생각할 줄 안다면, 애인 있는 애연가는 애가 탈 것 담배연기가 눈을 찔러 새 애인이 등 돌린 뒤 본의 아니게 연막(煙幕) 친 길 우산이 생각할 줄 안다면, 비오는 날들을 더 많이 만들겠지 우산 속에 젖지 않을 것들만 모여들고 우산 밖에서 불빛은 꺼지겠지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 글쎄 좀 큰일이야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닌 지구는 삼각형을 유지하려고 찌그러진 지구본이 바다로 떠난 배들을 대양의 꼭짓점 위로 내몰겠지 삼각뿔처럼 뾰쪽뾰쪽 허리가 아파.. 2018. 12. 18. 기형도, 病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2018. 12. 11. 박목월, 나무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2018. 12. 8. 허수경, 不醉不歸(불취불귀)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랬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2018. 12. 1. 박제영, 이중모음 이중모음과 발음하지 못하는그의 세계는 중학교 국어시간에 자기가 대포로 발포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늘 세개였지만 세계는 여전히 하나였다 어른이 되었지만 그의 겨울은 늘 거울 속에서 하얀 눈이 내렸고 그의 여름은 어름 속에서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언제나 여자를 좋아했지만 만나는 여자마다 그의 여자를 싫어했다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세개가 싫어 거울이 싫고 어름이 싫고 어자가 싫어 2018. 11. 28. 김승희, 희망이 외롭다1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다,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은 때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하지만 희망의 응급처치를 싫어하는 인간도 때로 있을 수 있네. 아마 그럴 수 있네, 절망이 더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 약을 구하러 멀리서 왔는데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믿을 정도로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 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 2018. 11. 28. 최영철, 극장의 추억 멀티 상영관만 아는 요즘 관객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말이야, 우리 땐 헐값에 영화 두 편 보여 주는 동시 상영관이란 게 있었어, 인간적이었지, 한 편으론 섭섭하니 한 편 더, 한 번으로는 안 풀리는 인생이니 앞엣것 지우고 한 번 더 금방 떨치고 온 오줌이란 놈이 저도 끼워 달라고 지린내 앞세우고 상영관까지 졸졸 따라 들어왔지, 그놈들 무르팍에 앉히고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푸르죽죽한 인생들이 흘려야 할 눈물이 저 정도 빗금은 되어야 할 걸 수백 번도 넘게 돌아갔을 화면이 시시한지 영화 세상은 자주 시공을 건너뛰었지, 박장대소 환호성 터트리느라 흐르는 눈물 닦느라 스크린은 자꾸 암전되었지, 건달들이 삑삑 휘파람을 불며 어딘가로 달아난 주인공들을 잡아들이면서 영화는 .. 2018. 11. 28.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 2018. 11. 28. 이전 1 ··· 8 9 10 11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