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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106

이현호, 살아있는 무대 ​ 내 얼굴을 보게. 내 이름은 더 훌륭해졌을도 모를, 혹은 '더는 아닌', '늦어버린', '안녕'이라고도 불리지 -유진오닐,(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다 나는 불행해졌다 아름다움은 무슨 색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름다움이 빚은 사람 같고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여서 세상은 눈부신 불행을 향해서만 살아남자고 다짐했다 살아남자는 살아서 남자는 건지 남았으니 살자는 건지 상관없었다. 아름다운 사람은 너무 아름다워서 사랑이란 게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해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했다 긍정적인 절망으로 절망적인 긍정으로 살아서 남아가며 나머지로 살아가며 종교 없는 사제같이 신도 없는 종교같이 무대 밖의 배우같이 관객 없는 무대같이 차라리 아름답게 망해버리기라도 .. 2019. 2. 17.
이현호, 검은 봉지의 마음 말하지 않아도 검은 봉지에 담아주는 것이다 배려란 이런 것이라는 듯 검은 봉지 속 같은 밤을 걸어 타박타박 돌아가다 보면 유리의 몸들이 부딪는 맑은 울음소리 난다 혼자는 아니라는 듯이 혼자와 환자 사이에는 ㅏ 라는 느낌씨 하나가 있을 뿐 아아, 속으로 삼켰다가 바닥에 쏟기도 하는 말라붙은 열, 형제자매의 소리 거리엔 늦은 약속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있고 길목을 네 발로 뛰어다니며 꼬리 흔드는 마음이 있고 떨리는 손으로 끝내 쥐고 놓지 않을 게 남았다 끊을 거야, 비록 이것이 우리의 입버릇이지만 간판이 빛난다는 건 아직 빈자리가 남았다는 뜻 습벽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같은 족속 너에겐 이파리를 찢는 버릇이 있었지 아무리 찢어발겨도 초록은 잎을 떠나지 않는데 검은 봉지 속 같은 방에 들어가 자기 숨에.. 2019. 2. 16.
안희연, 열과裂果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 2019. 2. 15.
류시화, 나무는 ​ ​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 2019. 2. 14.
이정하, 나무와 비 오랜 가뭄 속에서도 메말라 죽지 않은 것은 바로 너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수많은 나뭇가지와 잎새를 떨궈내면서도 근근히 목숨줄을 이어가는 것은 언젠가 네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대여,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껍데기가 벗겨지고 목줄기가 타는 불볕 속에서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도 가시지 않은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있다. 2019. 2. 13.
황인찬, 새로운 경험 어린 새가 가지에서 떨어진 것을 올려 주었다 가지 위의 새들이 다 날아갈 것을 알면서 그러나 이 시는 사랑에 대한 시는 아니다 어둠이나 인간 아니면 아름다움에 대한 것도 어린 새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인다 그러다 곧 날아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해가 진다 지난밤엔 너 참 인간적이구나, 그런 말을 들었는데 그래도 널 사랑해, 그렇게 말해 주었다 이 시는 슬픔에 대한 시는 아니다 저녁의 쓸쓸함이나 새의 날갯짓 아니면 이별 뒤의 감정에 대한 것도 "미안, 늦을 것 같아 어디 따뜻한 데 들어가 있어" 누군가 말하는 것이 들려왔고 갑자기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혹시 누가 보고 있나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2019. 2. 12.
안희연, 슬리핑백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않기를.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않기를. 밤낮없이 바다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2019. 2. 11.
황인찬, 소실 해변에 가득한 여름과 거리에 가득한 여름과 현관에 가득한 여름과 숲 속에 가득한 여름과 교정에 가득한 여름 물 위에 앉은 여름과 테이블 맞은편의 여름과 나무에 매달린 여름과 손 내밀어 잡히는 여름 잡히지 않는 여름 눈을 뜨니 여름이 다 지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선풍기는 돌아간다 등이 젖은 남자애들이 내 옆을 지나가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을 뽑는 이가 있다 창가에 걸어놓은 교복은 빠르게 말라가고 또 보다 많은 것들이 수쳇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래도록 그것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이 손을 언제 놓아야 할까 그 생각만 하면서 2019. 2. 10.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2019.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