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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106

신현림, 사과밭에서 온 불빛 사람을 만나서 밥과 술을 마셔도 결국은 지는 사과꽃처럼 흩어지고 헤어진다 매일 죽어가는 건 아이들도 알까 매일 다시 태어나도 고요한 자기 안의 길을 못 찾으면 풀죽은 와이셔츠만 걸어 다니고 까만 구두들만 돌아다니네 텅 빈 굴다리를 홀로 건너듯 쓸쓸히 마흔이 되면 나는 죽을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두 손과 두 어깨는 기댈 곳이 없었고 하늘에 구멍은 자꾸 커졌지 태양보다 한숨이 오가는 구멍을 보면서 그저 한심하게 행주처럼 울음을 끌어안고 슬픔을 멈추는 스위치도 없을 때 사과밭에서 온 불빛들이 나를 흔들어 깨웠어 월말, 연말, 종말이 온다는 한계도 생각 못할 때 여기에 내가 있기에 저기는 갈 수 없고 불빛 하나둘을 가지면 다른 불빛을 포기해야 함을 알았네 애를 가졌고 혼자 키워야 했기에 포기한 일과 만남들이 .. 2019. 2. 6.
김용락, 가을의 바다 중년의 사내가 마음속 깊은 상처 하나를 안고 백사장에 앉아 가을의 바다를 본다 바다는 지난 여름의 격렬한 감정이나 불면과 고통으로 더이상 나를 압도하지 않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혹은 세월처럼 혁명도 이데올로기도 저만치 멀어져버린 것 같은 오늘의 견딜 수 없는 이 쓸쓸함 그러나 그 속에서 패배를 배우고 인생의 겸허를 느껴보자 나도 이제는 가을의 바다를 깨달을 수 있는 나이 물러날 때의 쓰린 비애를 제대로 배워보자 2019. 2. 5.
이근화,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건넸어 일월 일일 영시 세계 각국의 인사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순차적으로 이 지구를 돌고 있겠지 그래 그 말이야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 그래서 그걸 축복하고 당신의 살아 있음을 내가 안다는 거 지금 우리가 놀랍게도 이백번을 말한다 해도 자연의 속도로 조금씩 늙어가겠지 벌을 서듯 잠을 자는데 겨드랑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들 이미 죽은 네가 새해 인사를 건넨다 이미 죽은 내가 새해 국수를 먹는다 자라다가 만 손톱 가는 머리 더 이상 살찌지 않는 몸 나도 나를 새롭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원 계단에 술 취해 쓰려져 자는 남자의 검은 외투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조용하게 잠을 자고 살을 부비고 새해를 낳아주고 싶다 버석버석 일어나 길고 긴 하품을 하고 싶다 향긋한 입속에서 태어날 내.. 2019. 2. 4.
김송포, 사사로운 일들의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어디선가 앞보다 뒤가 더 궁금해지는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관심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가 관심을 놓아버린 관계의 식을 보자 지하철에서 둘이 부둥켜안고 있는 남녀는 누구의 방해를 받는 줄 알면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보고 있어도 보게 만드는 아찔한 자세를 흘깃거리며 본다는 것은 즐거운 라라의 느낌이다 천천히 관계를 수정하며 풀어보자. 눈 오는 밤을 달리며 새벽을 뒤지는 사이, 고기 굽는 사내는 졸면서 마감을 알리는 청년에게 눈부시게 미안하다고 했다. 너와 나 사이의 관계는 아직 유효하다 등기를 한 달째 보관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개인 편지를 그렇게 공개하면 어떡하니 핀잔을 들었다. 누구를 위한 자랑인지 밥을 일단 먹고 생각해 보자. 겉보다 안의 관계가 궁금하다는 것은 어떤 공식으로도 풀리지 않아 난.. 2019. 2. 3.
김경주,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내 우주에 오면 위험하다 나는 네게 내 빵을 들켰다 기껏해야 생은 자기 피를 어슬렁거리다 가는 것이다 한겨울 얼어붙은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늘어지며 눈동자에 살이 천천히 오르고 있는 늑대 엄마 왜 우리는 자꾸 이승에서 희박해져가요 내가 태어날 때 나는 너를 핥아주었단다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싶은걸요 네 음모로 네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삶이란다 눈이 쏟아지면 앞발을 들어 인간의 방문을 수없이 두드리다가 아버지와 나는 같은 곳에 똥을 누게 되었단다 너와 누이들을 이곳에 물어 나르는데 우리는 30년 동안 침을 흘렸다 그사이 아버지는 인간 곁에 가기 위해 발이 두 개나 잘려 나갔단다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서성거리는 걸요 길 위에 피를 흘리고 다니지.. 2019. 2. 2.
김경주,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 한가운데에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 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2019. 2. 1.
허연, 폭설 말로 한 모든 것들은 죄악이 되고 죄악은 세월 사이로 들어가 화석이 된다는 걸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벼랑에서 마지막으로 웃고 있을 때, 나는 수백 개의 하얀 협곡 너머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웃음이 나의 이유였던 날. 이상하게도 소멸을 생각했습니다. 환희 속에서 생각하는 소멸. 체머리를 흔들었지만 소멸은 도망가지 않고 가까이 있었습니다. 원망하다 세월이 갔습니다.이제야 묻고 싶습니다. 두렵지는 않았는지. 망해 버린 노래처럼 그렇게 죽어갔던 과거를 당신이 어떻게 견뎌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나는 오늘도 소멸만 생각합니다. 협곡을 지나온 당신의 마지막 웃음을 폭설 속에서 읽습니다. 왜 당신은 지옥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죽어서 다시 천 년을 살 건가요. 당신은? 2019. 1. 31.
조병화, 라일락 여보, 라일락꽃이 한창이요이 향기 혼자 맡고 있노라니왈칵, 당신이 그리워지오 당신은 늘 그렇게 멀리있소그리워한들 당신이 알 리 없겠지만그리운 사람 있는 것만으로도나는 족하오 어차피 인생은 서로서로 떨어져 있는 거떨어져 있게 마련그리움 또한 그러한 것이려니오, 그리운 사람은 항상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련가 여보, 지금 이곳은라일락꽃으로 숨이차오. 2019. 1. 30.
김행숙, 밤에 밤에 날카로운 것이 없다면 빛은 어디서 생길까. 날카로운 것이 있어서 밤에 몸이 어두워지면 몇 개의 못이 반짝거린다. 나무 의자처럼 나는 못이 필요했다. 나는 밤에 내리는 눈처럼 앉아서, 앉아서 기다렸다. 나는 나를, 나는 나를, 나는 나를, 또 덮었다. 어둠이 깊어…… 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많이 가진 것이 밤이다. 밤에 네가 보이지 않는 것은 밤의 우물, 밤의 끈적이는 캐러멜, 밤의 진실. 밤에 나는 네가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낮에 네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낮의 스피커, 낮의 트럭, 낮의 불가능성, 낮의 진실. 낮에 나는 네가 떠났다고 결론 내렸다.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은 호주머니가 없고, 계절이 없고, 낮과 밤이 없겠지…… 그렇게 많은 것이 없다면 밤과 비슷할 것이다. 밤에 우리는 서로 닮.. 2019.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