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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106

이영광, 높새바람같이는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슴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2019. 3. 5.
김행숙, 다정함의 세계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2019. 3. 4.
이현호, 가정교육 빈집에 앉아 있다. 여기를 우리 집이라고 불렀던 사람이 있다 내가 가져본 적 없는 우리 집에서 그 사람과 나는 가질 수 없었던 추억을 미래로 던지며 없는 개를 길렀다 지붕 아래 숱한 약속을 속눈썹처럼 떨어뜨렸다 그 사람이 흘리고 간 속눈썹 하나쯤은 정말 머물러 있을 것 이어서 나는 없었던 개를 나지막이 불러보며, 신전처럼 고요히 앉아 있다 유일한 내 것을 지키는 중이다 혹시나 미래가 유실했을지 모를 내방(來訪)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쯤은 떨어져 있어야 할 속눈썹이 놀라 달아나지 않도록 가져본 적 없는 우리 집을 나는 과묵한 개처럼 지킨다 마음의 내방(內方)에 누구도 들인 적 없는 이에게는 추억이 없다, 마음 놓고 아플 수조차 없다는 거 그게 가장 따뜻한 추억이다 추악했음마저 그리운 그때 무풍지대로 흔들리며.. 2019. 3. 2.
심훈,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2019. 3. 1.
박준, 메밀국수 그때까지 제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은 먼 시간을 헤아리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때 저는 입을 조금 벌리고 턱을 길게 밀고 사람을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더 오래여도 좋다는 듯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 말입니다 2019. 2. 27.
문태준,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는 서로에게환한 등불남을 온기움직이는 별멀리 가는 날개여러 계절 가꾼 정원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풀에게는 풀여치가을에게는 갈잎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서로의 바다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고통의 구체적인 원인날마다 석양 2019. 2. 23.
송승언, 먼저 본 일에 대한 변명함 풀 무덤 위로 뛰어오르는 평화로운 개구리를 보는 유령망연, 이라고 발음하다가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유령 사랑을 잃고 허허로워 호수 수면에 떠오른 유령 빈집 뒤뜰에 무성한 파꽃을 정오 내내 가만히 바라보던 유령아무것도 안 나오는 텔레비전을 보던 유령 그 유령이 당신의 인생이었다 때때로 당신은 인생을 버리고 살기도 했다버린 것을 주워 푹푹 삶으며 살기도 했다 유령에 대해서 쓰지는 말아야지 생각했지만생각만으로는 되는 게 없었다나는 그저 유령이었고그건 내가 아닌 당신의 인생이었으니까 2019. 2. 22.
허수경,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못에 연분홍 푸른 빛 연밥이 열린 거, 연밥 따던 아씨들이 그 못가에 있던 거 못 위를 지나가던 바람이 붉은 빛이거나 누런 빛이거나 하던 거 그 위를 검거나 퍼렇거나 한 입성을 걸치고 죽은 이들이 걸어 다니던 거 걸어 다니면서 연밥 따던 아씨들을 안으려다가 허연 물빛에 스려지던 거 그래서 물이 검거나 푸르거나 허옇거나 하던 거 그 물 위를 불을 인 잠자리들이 날아 다니며 갈 그림자 던지곤 하던 거 2019. 2. 20.
허수경, 마치 꿈꾸는 것처럼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믿다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 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 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 2019. 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