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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

조연호, 달력의 순서

by Danao 2023.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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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화살표 방향으로만 여행 떠나고 인화액 속엔 천천히 부서지며 떠오르던 6월 먼지들. 너는 어두운 공을 골랐고 바람은 병든 잎마다 검진록을 적었다. 감추고 싶었니? 생식기에서 흐르는 물 따위를 언니와 엄마가 함께 수첩에 적어두는 게 슬프지 않았니? 달마다 너만 아는 첫날과 마지막 날의 달력이 완성될 때, 보라색 수국은 시시한 빙고게임에서 가로 다섯 줄 도제(徒弟)식 슬픔을 완성했다. 맑은 제방에 똑딱벌레처럼 하나씩 앉아 애들이 합창한다. 익숙하지 못한 척 처음인 척 우리 이대로 달력의 마지막 장까지 훌쩍 자라자. 너는 사라진 것들을 등받이 의자에 올려놓을 수도 있고 이제 겨우 누군가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나이. 우리는 강둑에 공명통처럼 둥글게 앉아 저녁의 소리를 부풀렸다. 그건 악운이었을까? 구름 속엔 얼음 고치처럼 단단히 물고기 울음만 떠다녔다. 우리가 하나씩 마음에 드는 색깔로 골라 가진 모조 반지들은 서른이 될 때까지, 이혼녀가 될 때까지, 미성년이 될 때까지, 그냥 재미로 기억했고 아무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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