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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

김언, 내가 말하는 동안

by Danao 2019.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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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동안 연기가 꺼졌다. 내가 말하는 동안 나뭇잎이 떨어지고 누군가 유혹에 넘어가서 그의 여자가 되었다. 아무렴 어떤가. 내가 말하는 동안인데 누가 누구를 유혹하고 공격하든 그것은 내가 말하는 동안 벌어지는 일, 내가 말하면서 통제하는 동안에도 소요는 일어나고 시위는 격렬해지고 부상자는 어제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사망자가 생겼다는 말은 여태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협상은 결렬되고 대치는 지속되고 한밤중의 응급실에 정체불명의 시체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 말은 쉬지 않고 입을 연다. 연기를 내보내고 입김을 뿜어 올리면서 지금이 겨울인가 묻는다. 지금이 여름이라도 묻는다. 어차피 한밤중인데 그사이 새벽으로 옮겨오고 아침으로 옮겨와서도사망자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고 미상이다. 불명이다. 아무렴 어떤가. 내 말은 나뭇잎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는데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은 분명히 푸르다 푸른색이 지나쳤다. 나는 그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고 내가 말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취소되었다. 잎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연기는 더 이상 올라가지도 않는다. 나는 그것을 지그시 밟아서 껐다 조용히 한 사람의 마음을 밟아서 끄듯이 그 마음을 일일이 나열하자니 내 말이 너무 길다. 내 말은 짧아야 한다.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세상은 짧게 짧게 순간을 바꿔간다. 짧게 짧게 내가 건드리는 모든 말을 개의치않고 연기는 올라간다. 아까 전에 올라갔던 그 연기를 취소하고 삭제하고 무시하면서 올라간다. 이제 그 연기를 건드리고 싶다. 떨어졌던 나뭇잎이 다시 올라간다. 푸른색이 지나쳐서 아직은 연녹색인 그 나뭇잎을 내가 왜 사랑했을까. 마음에 두었을까. 이런 말을 생략하는 동안에도 나뭇잎은 푸르다. 분명히 푸르다. 푸른색이 지나쳐서 눈에 띄지 않는 군복을 입은 자들이 야산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도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해두고 있다. 내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숙영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순간순간 정세를 바꿔가며 어딘가의 밤하늘을 덮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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