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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김상욱 "물리학자가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지난 13일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열린 김상욱 물리학자의 강연을 보고 왔다. 강연을 보는 동안에는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메모조차 잘 하지 않았는데, 후기를 남기려고 하다보니 메모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강연 내용도 많이 빠지고 순서도 다를 수 있겠지만 일부나마 기록해두기로 한다. "빛은 어둠의 부재다." 강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슬라이드에서 마주한 문장이다. 우리는 쉽게 어둠이 빛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디폴트 값을 어둠이 아닌 빛으로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우주의 디폴트 값은 어둠이다. 어둠이 빼곡하고, 가끔 빛이 있을 뿐이다. 우주의 실체는 '어둠'이라 말할 수 있다. 태양이 사과라면, 지구는 먼지만한 크기이고, 해왕성은 대만쯤 위치한다는 비유는 어둠으로 가득찬 우주의 모습을 대변한.. 2018. 12. 18.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 사랑을 읽으러 왔다가 죽음을 읽었다.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 많았다. 나는 본래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소설을 손에 쥐게 된 것은 한 작품만으로도 많은 장면을 손에 쥔채 책을 덮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케이와 씨 유디트 미미 몇 안되는 사람들이 인물이 되고 몇안되는 배경과 특별할 것 없는 사건 속 긴장되는 일화는 책을 순식간에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클림트의 유디트를 실제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읽으면서 들은 my funny valentine 은 나를 차안에 가두었다. 그리고 유디트와 씨가 함박눈속에 가둔 그 순간에도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책을 소장하고 싶은데, 다시 펼쳐보기엔 아직 나는 젊다. 밖에 나가면 가을이 있을 것 같다. 눈이라도 내리면 좋겠다. 2015년 9월 3일 2018. 12. 14.
기형도, 病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2018. 12. 11.
박목월, 나무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2018. 12. 8.
허수경, 不醉不歸(불취불귀)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랬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2018. 12. 1.
박제영, 이중모음 이중모음과 발음하지 못하는그의 세계는 중학교 국어시간에 자기가 대포로 발포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늘 세개였지만 세계는 여전히 하나였다 어른이 되었지만 그의 겨울은 늘 거울 속에서 하얀 눈이 내렸고 그의 여름은 어름 속에서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언제나 여자를 좋아했지만 만나는 여자마다 그의 여자를 싫어했다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세개가 싫어 거울이 싫고 어름이 싫고 어자가 싫어 2018. 11. 28.
김승희, 희망이 외롭다1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다,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은 때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하지만 희망의 응급처치를 싫어하는 인간도 때로 있을 수 있네. 아마 그럴 수 있네, 절망이 더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 약을 구하러 멀리서 왔는데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믿을 정도로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 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 2018. 11. 28.
최영철, 극장의 추억 멀티 상영관만 아는 요즘 관객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말이야, 우리 땐 헐값에 영화 두 편 보여 주는 동시 상영관이란 게 있었어, 인간적이었지, 한 편으론 섭섭하니 한 편 더, 한 번으로는 안 풀리는 인생이니 앞엣것 지우고 한 번 더 금방 떨치고 온 오줌이란 놈이 저도 끼워 달라고 지린내 앞세우고 상영관까지 졸졸 따라 들어왔지, 그놈들 무르팍에 앉히고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푸르죽죽한 인생들이 흘려야 할 눈물이 저 정도 빗금은 되어야 할 걸 수백 번도 넘게 돌아갔을 화면이 시시한지 영화 세상은 자주 시공을 건너뛰었지, 박장대소 환호성 터트리느라 흐르는 눈물 닦느라 스크린은 자꾸 암전되었지, 건달들이 삑삑 휘파람을 불며 어딘가로 달아난 주인공들을 잡아들이면서 영화는 .. 2018. 11. 28.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 2018.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