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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멀리서만 찾아나서지 않기로 했다 가기로 하면 가지 못할 일도 아니나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움 안고 지내기로 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대가 많이 변했다니 세월따라 변하는 건 탓할 건 못 되지만 예전의 그대가 아닌 그 낭패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멀리서 멀리서만 그대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2018. 11. 28.
이정하, 빈 강에 서서 1 날마다 바람이 불었지 내가 날리던 그리움의 연은 항시 강 어귀의 허리 굽은 하늘가에 걸려 있었고 그대의 한숨처럼 빈 강에 안개가 깔릴 때면 조용히 지워지는 수평선과 함께 돌아서던 그대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랐지. 저무는 강, 그 강을 마주하고 있으면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목숨처럼 부는, 목숨처럼 부대끼는 기억들뿐이었지. 2 미명이다. 신음처럼 들려오는 잡풀들 숨소리 어둠이 뒷모습을 보이면 강바람을 잡고 일어나 가난을 밝히는 새벽 풍경들. 항시 홀로 떠오르는 입산금지의 산영(山影)이 외롭고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슬픔의 시작이었지. 3 다시 저녁. 무엇일까 무엇일까 죽음보다 고된 하루를 마련하며 단단하게 우리를 거머쥐는 어둠, 어둠을 풀어놓으며 저물기 시작한 강, 흘러온 지 오래인 우리의 사랑.. 2018. 11. 28.
기형도, 10월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은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 2018. 11. 28.
이정록, 내 품에, 그대 눈물을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 그대가 훅 불면 하얀 속이 다 보이지 방을 얻고 도배를 하고 주인에게 주소를 적어 와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를 들이는 사이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면 봉숭아 씨처럼 달려나가는 거야 우리가, 같은 주소를 갖고 있구나 전자레인지 속 빵봉지처럼 따뜻하게 부풀어 오르는 우리의 사랑 내 가슴은 포도밭 종이봉지야 그대 슬픔마저 알알이 여물 수 있지 그대 눈물의 향을 마시며 나는 바래어가도 좋아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대 그늘에 다가갈 수 있는 내 사랑은 포도밭 종이봉지야 그대의 온몸에, 내 기쁨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로 갈 거야 긴 장마를 건너 햇살 눈부신 가을이 될 거야 2018.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