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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

김소연,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by Danao 2019.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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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무덤을 팝니다 미리 나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을 비는 일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한 너의 오열도 오열 끝의 오한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의 지복도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궁극이 폐허입니다 한 세기가 지나갈 때마다 한 삽씩 뜨거운 땅을 파고 이 별의 핵 지대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너를 만나길 지나치게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안에 들어가 미리 누워봅니다 생각보다 깊고 아득합니다 그렇지만 무섭고 춥습니다

너는 내 귀에다 대고 거짓말 좀 잘해주실래요 너무나 진짜 같은 완벽한 거짓말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찾듯 거짓말 덕분에 이 우주는 겨우 응석을 멈춥니다 어지럽습니다 체한 걸까요 손을 넣어 토하려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여긴 왜 이렇게 추운가요

너는 여기로 올 때에 좀 조심해서 와주실래요 뒤를 밟는 별들과 오다 만난 유성우들은 제발 좀 따돌리고 너 혼자 유령처럼 와주실래요 내 몸은 너무 오래 개기월식을 살아온 지구 뒤편의 달, 사늘하게 식었을 뿐 새가 가지를 털고 날아만 가도 요란을 떠는, 풍화도 침식도 없는 그늘입니다 뜨거운 속엣것이 고스란히 보존된 광대한 고요란 말입니다 춥습니다

칼을 들어 한 가지 표정을 새기느라 또 한 세기를 보냈습니다 나를 비출 거울이 없었으므로 아마도 난자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보았습니다 한가지 표정이기를 바랍니다 피를 너무 흘려 몸이 좀 싸늘합니다 냉기 가득한 살갗에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가 반가워 죽겠습니다

쥐똥나무 꽃향기가 지독해서 귀를 틀어막고 누워있습니다 이 꽃이 지고 나면 이 별에는 더위가 시작될 겁니다

너는 지금 간신히 내 몸속에 도착해 있습니다 해수의 밀도는 낮아집니다 간빙기를 끝내는 소리가 지구 바깥에서 우렁찹니다 깊은 땅속이 먼저 뜨거워지고 빙산은 모든 것을 묵인하고 버티려다 쩍쩍 갈라져 천둥같은 울음을 보냅니다 눈물이 이토록 범람하면 지형이 곧 바뀔겁니다 내 몸에서 거대한 울음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서로 부딪혀 얼음 멍이 들고 있습니다 무정할 수는 없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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