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너는 지금 청준(靑春) 아닌 홍하(紅夏),
설령 필생의 여름을 걸고 내게 온다 해도
너와 함께 먼 미래를 재어볼 수는 없네
말하자면 나는 이미 다른 꽃으로 집을 지었으니
바람이 집을 허물게 두는 것은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
이라 지금도 생각하거든
붉은 여름 내내 저 짙푸른 산 앞에서
수다한 붉은 말을 내게 속삭인다 해도
굳이 밝히자면 나는 붉은 꽃이 만발한 네 몸이 탐날 뿐
네 붉은 몸을 잘 보고 싶을 뿐
네 붉은 몸을 잠시만 만지고 냄새 맡고 싶을 뿐
네가 사랑으로 방향을 물어온다면
짐짓 나도 사랑으로 가리킬 수는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 백 일 비밀스런 사랑의 시늉뿐
너는 아직 서른 해도 살지 않아 줄기는 무르고 약한데
그래도 저렇게 무거운 붉은 꽃들을 이고 있는데
나는 머리카락도 많이 색을 잃은, 내일모레 쉰
네 힘겨운 붉은 짐을 선뜻 다 옮겨받을 수 없는데
알까, 네가 찬란하게 사랑하는 건 남이 아닌,
네 붉은 몸이 네 마음 안쪽 벽에 되비친 같은 색 그림자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건 네가 아닌,
위태롭게 휘황한 네 붉은 백 일뿐
네가 기다리는 사랑의 몸짓을 나 또한 바라므로
못 이기는 척 어울리 수는 있으나 백 일이 다 지나면
가야 할, 더는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길이 내게 있다네
너는 또다른 붉은 백 일들을 거듭 살아야 할 것이며
반응형
'poe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병모, 당신과 나의 학이편 (0) | 2019.08.25 |
---|---|
박준, 선잠 (0) | 2019.05.02 |
김양숙, 삼월에 걸려 넘어지다 (0) | 2019.03.09 |
김소연,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0) | 2019.03.07 |
황동규, 초가 (0) | 2019.03.06 |
댓글